배터리보다 중요한 변화, 전기를 ‘덜 잃는 기술’의 등장
전기차 시대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키워드는 여전히 배터리다. 배터리 용량이 얼마인지, 충전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주행거리가 몇 킬로미터까지 늘어났는지가 전기차 기술 발전의 척도로 인식된다. 하지만 산업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기차 경쟁의 무게중심은 점점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 핵심은 전기를 얼마나 많이 저장하느냐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전기를 얼마나 덜 잃느냐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와 달리 모든 에너지 흐름이 전기 시스템을 통해 이뤄진다. 배터리에서 나온 전기는 인버터를 거쳐 모터로 전달되고, 다시 제동 과정에서 회수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과 전력 손실은 주행거리 감소와 직결된다. 같은 배터리를 쓰더라도 전력 손실이 적은 차량이 더 멀리 갈 수 있는 이유다. 결국 전기차 성능을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핵심은 전력 변환 효율이며, 이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전력반도체다.
최근 전기차 업계가 기존 실리콘(Si) 기반 전력반도체에서 탄화규소(SiC) 기반 전력반도체로 빠르게 이동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SiC 전력반도체는 고전압·고온 환경에서도 손실이 적고, 스위칭 속도가 빨라 열 발생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전기차의 주행거리가 수십 킬로미터 늘어나는 효과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전기 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실리콘의 한계와 SiC 전력반도체가 선택된 이유
실리콘은 반도체 산업을 수십 년간 지탱해온 물질이다. 공정 기술이 성숙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며, 가격 경쟁력도 뛰어나다. 하지만 전기차와 같은 고전압·고출력 환경에서는 실리콘의 물리적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압이 높아질수록 손실이 급격히 증가하고, 열 관리 부담도 커진다. 이로 인해 시스템 전체가 복잡해지고 무거워진다.
탄화규소는 이러한 실리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표적인 화합물 반도체다. SiC는 실리콘보다 밴드갭이 넓어 고온에서도 안정적으로 동작하며, 동일 조건에서 전력 손실이 훨씬 적다. 인버터와 충전 시스템을 더 작고 가볍게 만들 수 있고, 냉각 시스템도 단순화할 수 있다. 이는 곧 차량 무게 감소와 공간 효율 개선으로 이어진다.
중요한 점은 SiC 전력반도체가 단순히 기존 부품을 대체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기차의 전력 아키텍처 자체를 바꾸는 촉매 역할을 한다. 기존에는 전력 손실을 감안해 보수적으로 설계했던 시스템을 보다 공격적으로 최적화할 수 있게 되면서, 차량 설계의 자유도가 크게 높아진다. 전기차 제조사들이 SiC 채택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유다.
2024년 기준 SiC 전력반도체를 채택한 전기차 비중이 이미 30%를 넘어섰다는 점은 이 흐름이 일시적 유행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술 전환의 초기 단계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누가 더 안정적으로, 더 싸게, 더 많이 공급할 수 있느냐의 경쟁으로 접어들고 있다.
전기차를 넘어 데이터센터·전력망까지 확장되는 SiC의 전장
SiC 전력반도체의 전장은 전기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데이터센터, 신재생에너지, 전력망 등 전기화가 진행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SiC의 필요성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특히 AI 확산으로 전력 소비가 급증한 데이터센터에서는 전력 효율이 곧 운영 비용과 직결된다. 수 퍼센트의 손실 감소만으로도 연간 수백억 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환경에서, 고효율 전력반도체는 핵심 설비로 자리 잡고 있다.
전력망 역시 마찬가지다.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는 출력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전력 변환과 제어 기술이 중요하다. SiC 전력반도체는 고전압 환경에서 안정적인 스위칭이 가능해, 차세대 전력망의 핵심 부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보다, 생산된 전기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제어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시대다.
이처럼 SiC 전력반도체는 특정 산업의 부품이 아니라, 전기 시스템 전체의 성능을 좌우하는 기반 기술로 진화하고 있다. 전기차는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보여준 사례일 뿐이다. 시장이 빠르게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로벌 컨설팅사들이 2030년 SiC 시장 규모를 현재의 5~7배 이상으로 전망하는 이유는 단순한 수요 증가가 아니라, 적용 범위 자체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미국·중국이 선점한 전기국가 패권 경쟁의 핵심 축
SiC 전력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들의 면면을 보면 이 기술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유럽의 인피니언, 미국의 온세미는 단순한 반도체 기업이 아니라, 오랜 기간 전력·자동차 산업과 함께 성장해온 기업들이다. 이들은 전력반도체를 개별 부품이 아닌 시스템 관점에서 접근해왔고, 완성차 업체와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시장을 선점했다.
중국의 추격도 매우 거세다. 중국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늘리고 있으며, 정부 차원의 지원을 통해 SiC 웨이퍼부터 소자까지 수직 계열화를 추진 중이다. 전기차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삼은 중국에게 SiC 전력반도체는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핵심 퍼즐이다.
이 흐름은 SiC 전력반도체가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전기국가 패권 경쟁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 이 기술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에 따라 전기차, AI 인프라, 전력망 주도권이 결정된다. 이는 과거 메모리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경쟁과는 다른 양상이다. 기술 장벽이 높고, 장기간의 투자와 경험이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뒤처진 이유와 화합물 반도체 전략이 필요한 시점
문제는 한국의 위치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세계 최강국이지만, 화합물 전력반도체에서는 명백한 후발주자다. 국내 기업의 SiC 반도체 매출이 아직 수백억 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이 격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기술력 부족이라기보다, 산업 전략의 부재에 가깝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오랫동안 대규모 설비 투자와 규모의 경제에 최적화된 구조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SiC 전력반도체는 초기 투자 비용이 크고, 수율 확보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며, 고객 맞춤형 설계 역량이 중요하다. 기존 메모리 중심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택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기차, 데이터센터, 전력망이 동시에 성장하는 지금이야말로 화합물 반도체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격상시킬 마지막 기회에 가깝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장기적인 생태계 구축과 인력 양성, 수요 기업과의 공동 개발이 필요하다. 전력반도체는 단기간에 추격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SiC 전력반도체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소비자도 체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기차의 주행거리, 데이터센터의 전력 효율, 국가 전력망의 안정성을 좌우하는 진짜 심장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기술에 있다. 지금 한국이 이 흐름을 놓친다면, 전기화 시대의 핵심 인프라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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